단지 우주를
사랑했을 뿐인데...

[우주人]
나치의 수하에서 미국의 영웅으로
베르너 폰 브라운의 드라마 같은 삶

인명 살상무기 미사일 V2도
달 착륙 로켓 새턴V도
모두 이 한사람이 만들었다

전쟁의 광기 뒤편에 과학의 진화
칼을 무사가 잡으면 사람 죽이는 도구가 되고, 셰프가 잡으면 입맛을 살리는 도구가 된다. 핵분열 기술도 무기에 쓰이면 인명을 대량살상하는 핵폭탄이 되고, 원자력발전소에 쓰이면 값싼 전기를 생산하는 에너지원이 된다. 이처럼 세상의 많은 것들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미·소 냉전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무기의 발달과 함께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끌어냈다. 핵폭탄,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우주로켓 등 우리에게 친숙한 무기들 상당수가 이 시대에 기본 틀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에 로켓 엔진이 더 정교해지거나, 미사일 사거리가 길어지고, 탑재하는 핵탄두가 더 무거워졌을 따름이다. 이러한 20세기 중반 걸출한 과학 천재들이 많이 나왔고, 그중 로켓의 역사는 이 사람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나치 독일하에서 탄도미사일 V2를 개발해 영국 폭격에 일조했지만, 미국으로 투항해 새턴V 로켓으로 인류의 달 착륙을 주도한 '문제적 인간'. 독일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이다. 

 

 

떡잎부터 로켓과 우주를 꿈꾸다

폰 브라운은 1912년 독일에서 부유한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 신문을 읽기 시작했고 피아노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가 처음으로 로켓 시험을 한 것은 12세 때였다. 나무 손수레에 대형 불꽃놀이용 로켓 여섯 개를 매달고 내달려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또한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며, 우주 개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5세 때는 ‘액체로켓 선구자’였던 오베르트의 책을 읽은 뒤, 싫어했던 수학과 물리를 파고들었다(로켓 연구엔 필수니까). 비범한 학업 성취도를 보인 폰 브라운은 베를린에 있는 공과대학에 진학했고, 평소 동경하던 오베르트의 도제가 되었다.


오베르트는 액체로켓을 제작하여 지상에서 작동시키는데 성공했고, 이후 폰 브라운은 다른 아마추어 로켓 동료들과 함께 실험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로켓 실험은 큰 자금이 소요되었고, 폭발과 화재 위험이 커 장소를 찾는 게 큰 문제였다.  결국 폰 브라운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독일 육군에 찾아가 설득에 나섰고, 로켓 개발을 약속받았다. 그는 육군 장학금을 받으며, 로켓 개발 기술책임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1934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액체로켓 A’ 시리즈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로켓 A1은 비행시험에서 점화 후 0.5초만에 폭발했다. 설계를 바꾼 A2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고, 훨씬 강력하고 큰 후속 모델 로켓을 개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폰 브라운 뿐 아니라 인류의 운명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2천대의 탱크와 1천기의 전폭기를 앞세워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  
 
"엉뚱한 행성에 착륙했구먼..."
1943년 5월 독일군 장성들은 로켓 A4의 시험발사를 관람했다. A4는 100km 고도까지 올라갔다가 348초 후에 280km 떨어진 곳에 낙하했고, 예정된 목표에서 불과 5km밖에 벗어나지 않았다. 성공 발사를 전해들은 히틀러는 폰 브라운을 불러 프레젠테이션을 받았고, 괴벨스는 전국 라디오 방송연설 중 ‘기적의 무기’가 곧 등장할 것임을 암시했다. 매일같이 독일의 도시들을 폭격하는 연합군에 맞서 독일도 반격할 것이며, 그 보복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이 방송연설 후에 A4는 ‘보복병기 2(Vergeltungswaffe 2)’, 약자로 V2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무려 6만5000번의 크고 작은 설계 변동과 개선을 거쳐, 1944년 9월 8일 런던을 향해 V2가 발사됐다. 저녁 6시35분에 발사된 V2는 소리 없이 날아가 사람들이 붐비는 런던 교외 근방에 떨어졌고, 이 폭발로 3명이 생명을 잃고 10명이 심하게 다쳤다. 폰 브라운은 그 소식을 접하고 “로켓은 완벽하게 작동했지만, 엉뚱한 행성에 착륙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달과 다른 행성을 탐험하려는 꿈을 꾸어왔고, 그 수단으로 로켓을 개발했던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을 것이다.     

 

미국에 투항하다
1945년 초, 독일 패망의 그림자가 짙어지며 폰 브라운을 비롯한 독일의 로켓 기술팀은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대감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을 미군의 포로가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산에서 숨어지내다 미군에 투항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소련·영국은 독일의 앞선 장비와 과학기술자 확보를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45년 9월 폰 브라운은 미 뉴멕시코주 앨패소 근처의 포트 블리스(육군시설)에 도착했고, 뒤이어 독일 로켓팀 118명이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미군의 자문에 응하는 한편, V2 성능 개량 등 로켓 프로그램에 관련된 업무에 종사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계와 군부는 전시체제를 평시체제로 바꾸고 군비를 줄여 예산을 축소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장거리 미사일이나 우주개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는 소련과는 매우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소련은 처음부터 장거리 로켓 개발을 염두에 두고 독일 기술자들을 모았고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폰 브라운은 미 육군의 지원으로 전장에서 사용할 사거리 300km의 새로운 단거리 탄도탄 ‘레드스톤’의 설계를 맡았다. 이는 새로운 기회였고, 발사한 38기 중 35기가 성공해 미 육군에 폰 브라운의 진가를 입증했다.  

 

 

미국의 자존심을 세우고 

1955년 폰 브라운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즈음엔 미 대중에게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우주의 경계를 넘어서’ ‘달 정복’ ‘화성 탐사’ 등 세 권의 책을 펴냈고, 월트 디즈니와 협력해 영화 등으로 우주 개척을 열정적으로 홍보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고, 그 냉전은 인공위성 등 우주로까지 확장되기 시작했다. 첩보위성을 극비리에 개발하던 미 정부는 소련을 무시했지만, 소련은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리며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조그만 공’ 정도로 치부하며 애써 폄하했지만, 일명 ‘스푸트니크 쇼크’라 불리는 충격이 미국 사회를 강타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이제 소련은 고속도로 다리 위의 아이들이 지나가는 차를 향해 돌을 던지듯 우리 위로 미사일을 날릴 것이다”라며 아이젠하워 정부의 허술한 안보대책을 성토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소련은 또다시 6kg의 ‘라이카’라는 강아지를 싣고 위성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했다. 
 급해진 미국은 결국 폰 브라운에게 SOS를 쳤고, 그는 지시를 받은 지 84일만인 1958년 1월 31일 위성 ‘익스플로러’를 쏘아올려 미국의 자존심을 세웠다. 폰 브라운이 천재 나치 과학자 또는 나치 친위대 소령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미국의 영웅이 된 순간이었다.  

 

마침내 괴물을 탄생시키다 
소련과의 기술격차를 느낀 미국은 1958년 2월 대통령 과학자문위원회를 소집했고, 여기서 모든 비군사적 우주활동을 전담 총괄하는 새로운 기구의 창설을 제안했다. 마침내 10월 1일 NASA(미항공우주국)이 공식 출범한 것이다. 폰 브라운 및 그의 그룹 4500명과 시설 또한 육군에서 NASA로 이관했고, 그는 마셜우주비행센터의 책임자로 임명됐다. 이로써 폰 브라운은 무기가 아닌 순수 우주 발사용 로켓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고, 소년 시절의 꿈을 실현하는 감동적인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유인 우주비행이 처음으로 성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선수를 또 빼앗긴 미국은 벼랑 끝에 몰렸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유인 달탐사 계획, 즉 아폴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소련을 확실하게 누르는 길은 우주인을 달 표면에 착륙시키고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는 것 뿐이었다. 미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 안에 우주인을 달에 보내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결국 폰 브라운을 필두로 NASA는 아폴로 11호를 싣고 우주로 향할 괴물로켓 새턴V를 개발했다. 이 괴물로켓의 높이는 110m가 넘고 무게는 3000t에 좀 못 미치는데, 이는 티라노사우르수같은 공룡 300~400마리를 합쳐 놓은 무게다. 오로지 달 착륙을 목적으로 개발된 액체로켓으로, 지금까지도 인류가 개발한 로켓 중 가장 큰 추력을 가진 로켓이다.
1969년 7월 16일, 거대한 새턴V가 서서히 떠올랐고 가속도가 붙으면서 아득히 멀어져 갔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이정표의 출발점이었다. 폰 브라운의 생애에서도 최고의 순간이었다. 

 

 

끝까지 괴롭힌 나치 꼬리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이후, 미 정부는 베트남전의 비용과 누적되는 적자로 우주개발에 난색을 표하기 시작했다. NASA 예산이 줄어들고 프로그램들이 취소되며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때마침 NASA 수뇌부로 나치를 증오하는 유대인 출신 인사가 오면서, 폰 브라운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결국 1972년 NASA를 떠나 민간회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로부터 3년 후, 폰 브라운은 대장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받았다. 병세가 깊어지자 그에게 ‘과학메달(National Medal of Science)’을 수여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나치 꼬리표가 달린 그에게는 적이 많았다. 2차 세계대전 때 V2 로켓을 만들어 수천 발이나 영국에 발사하게 한 장본인에게 메달 수여는 말이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사망 3개월 전 병상에서 메달을 전달받은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물을 보였다.  
 

1977년 6월 16일, 65세를 일기로 폰 브라운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V2 로켓 재돌입을 지켜보다 죽을 뻔했고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의 폭격을 당하는 등 여덟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아홉 번째 찾아온 병마는 피할 수 없었다. 고양이처럼 그도 딱 아홉 개의 생명이 있었던 걸까. 

나치의 꼬리표를 달고 달 로켓을 쏘아올린 그의 삶을 재단하기는 쉽지 않다. 아폴로 11호 승무원들은 지구로 귀환한 후 영웅이 되었고 ‘첫 번째로 달에 가다(First on the Moon)’라는 책을 펴냈다. 그들은 폰 브라운에게 책을 선물하며 이렇게 적었다.  

“달 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예언했고, 광고했고, 지휘했고, 이끌어주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달까지 밀어준 베르너에게” 

 

-참고도서
로켓을 꿈꾼 소년들 (정규수·정광화, 지성사)
그래서 우리는 달에 간다 (곽재식, 동아시아)
달의 뒤편으로 간 사람 (베아 우스마 쉬페르트, 비룡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