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기억, 욕망, 정체성
토탈 리콜 : 나는 누구인가?

엔지니어 출신 변호사의 'SF대작' 읽기= 필립 K. 딕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이 글을 쓴 최기욱 변호사는 SF 열혈팬이다. 우주시대의 씨앗을 일찌감치 뿌려온 SF대작들을 영상 리메이크 작품과 비교해 소개함으로써 우주문화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이 코너를 마련했다. 이 글은 코스모스 타임즈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


우리는 모두 화성에 가고 싶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멋진 모험을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현실의 한계로 인해 욕망하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상현실에서의 여행이 훌륭한 대체재가 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여행과 같이 ‘체험’이 중요한 분야에서 가상현실 체험은 조금 부족할 수 있다. 단순히 가상현실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 기억을 조작하여 ‘실제로’ 화성여행을 다녀온 것과 같이 만들어준다면 어떨까? 신빙성을 위해 소정의 기념품까지 함께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내가 화성에 여행을 다녀왔다고 기억하는 것과 실제로 내가 화성 여행을 다녀온 것은 ‘내’게 있어 차이가 있는가? 이것은 기억, 욕망,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논의이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주연의 영화 <토탈리콜>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원제 : We Can Remember For You Wholesale)>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가짜 기억이 심어진 진짜 화성 특수요원의 욕망

 

인공 기억 이식 기술이 발달한 미래, 평범한 직장인인 더글라스 퀘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너무나도 평범하고 지루한 삶에 불만을 느끼며, 화성에 가는 강렬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 화성이라는 낯선 세계에서, 비밀요원 같은 스릴 넘치는 모험을 즐기는 삶 말이다. 하지만 실제 화성 여행을 갈 여유가 없던 그는 가짜 기억을 심어준다는 'Rekal, Inc.'라는 회사의 광고를 보고, 화성에서의 모험을 현실화해보기로 결심한다.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애매모호하고 누락된 내용도 있고, 심심하면 생략되고 왜곡도 되는 진짜 기억- 그것들이 바로 차선책인 겁니다.”

 

그런데 기억 이식 절차가 진행되는 도중, Rekal의 기술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퀘일은 단순히 화성에서 비밀요원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과거에 화성에서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었지만, 정부가 그의 기억을 억눌러왔기에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화성의 비밀요원으로서의 낭만을 욕망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다 기억 이식 절차에서의 약물이 그의 억눌린 기억을 깨우게 된 것.

 

퀘일이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그가 수행했던 비밀임무들을 깨달음에 따라 정부 요원들은 그를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퀘일이 아무리 날고 기는 특수요원이었어도 정부를 상대로는 어림없다. 그의 두개골 속에는 원격 송신기가 들어있었고, 도망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평생을 쫓기는 신세로 살아야 한다. 도저히 달아날 길이 보이지 않자 그는 정부와 협상을 한다.

 

'나의 목숨을 살려달라. 나의 진짜 기억을 제거하고 새로운 기억을 심어달라. 대신 방금 전 벌어진 것과 같이 얕게 묻혀진 기억이 욕구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훨씬 강렬한 기억을 새겨넣으면 어떻겠는가. 아주 강렬한 기억, 내가 꿈꾸는 가장 허황된 백일몽을 바탕으로 한 가짜 기억을...'

 

그럴싸하다. 정부에서도 그간의 퀘일의 노고와 옛 정을 고려하여 그를 살려두기로 한다. 그리고 Rekal사에서 정부요원, 퀘일은 다 같이 퀘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그의 가장 허황된 꿈을 찾기 시작하는데…

 

필립 K. 딕의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단순한 미래 기술과 모험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탐구로서 기억, 욕망, 정체성이라는 핵심 주제를 다룬다. 수많은 실험들을 통해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이 알려져 있듯이, 이 이야기 속에서 기억은 불안정하고 조작 가능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욕망은 인간 행동의 원동력으로, 정체성은 외부의 영향에 의해 형성되는 불확실한 구성물로 묘사된다. 기억, 욕망, 정체성. 이 주제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딕은 이 작품을 통해 기억이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하는지, 욕망이 우리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러한 구성물들이 조작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탐구했다.

 

기억이 심어지는 것을 넘어서 조작되고 선별될 수 있다면, 질문이 생긴다. 나는 누구인가? / imdb.com

 

기억 vs 현실 : 나는 누구인가?

 

딕의 소설 속에서 기억은 현실을 인식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기억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기억의 신뢰성은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자신에 의해, 주변 사람들에 의해. 퀘일의 경우 기억이식 과정에서 억눌린 기억들이 드러나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까지 흐려지기 시작한다. 퀘일의 기억은 진짜인 동시에 조작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것이 내게 있어 진실한 것인가. 아니, 진실이란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한가?

 

“우습게도 그는 리콜 주식회사에 부탁했던 것을 완벽하게 얻은 셈이었다. 모험, 위험, 인터플랜 보안 요원, 목숨이 위험한 화성으로의 비밀 여행 - 그가 거짓 기억으로 원했던 것 모두를. 그리고 이제는 그도 그런 모든 것이 단순한 기억일 때의 장점을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딕은 기억이 외부의 영향(Rekal, 정부),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의해 쉽게 조작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기억이 조작되거나 재작성될 수 있다면, 우리의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형성해온 정체성은 내가 쌓아온 기억에 의존하기에. 퀘일은 이야기 내내 어떤 기억을 믿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다. ‘어떤 기억이 진짜인가?’라는 물음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가장 허황된 꿈을 욕망하는 화성 비밀요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imdb.com

 

욕망 vs 정체성 : 나는 누구이고 싶은가?

 

욕망은 이 이야기에서 퀘일의 성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퀘일의 화성에 가고자 하는 욕망은 더 깊은 차원에서의 의미와 모험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는 장치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난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면 저 깊은 곳에 그 근원이 되는 무엇인가가 도사리고 있다. 딕의 작품에서 흔히 나타나는 주제 중 하나이다.

 

퀘일의 욕망은 단순히 비범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평범한 삶을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욕구였다. 일과 잠 말고는 없는 무료한 회사원 생활. 자신의 정체성은 이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욕망했다. 화성에서의 모험을.

 

욕망은 퀘일의 행동을 주도하고, 그의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처음에는 이룰 수 없는 꿈에 의해 정의된 것으로 보였던 그의 정체성은 진정한 과거를 발견함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나 딕은 욕망과 정체성의 관계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퀘일의 가장 깊은 소원이 현실이 되었을 때조차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결국 딕은 욕망이 인간의 동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명확한 충족감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욕망은 우리를 정의함과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와 ‘누구이고 싶은지’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한다.

 

수많은 기억들, 수많은 신분들, 정체성은 점점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 imdb.com

 

조작된 기억 + 심어진 욕망 = 불안정한 정체성  

 

퀘일의 여정을 통해, 딕은 기술과 권력 같은 외부 영향에 의해 정체성이 얼마나 불안정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퀘일의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가 기억하는 혹은 이식받는 기억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화성 여행을 꿈꾸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억눌린 기억이 드러나면서 깨지며 그는 과거 비밀 요원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비밀요원으로서의 정체성은 그가 품고 있던 어린 시절의 판타지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의 정체성이 조작 가능한 기억에 기반한 것이라면, 혹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욕망에 의해 형성된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퀘일의 정체성은 억눌린 기억과 Rekal이나 정부가 심어준 욕망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딕은 우리의 자아는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통제 밖에 있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이 명작은 기억, 욕망,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복잡한 탐구를 제시하며, 명확해보이는 이 개념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안정적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기억과 욕망이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다면, 과연 우리는 자신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가? 심지어 인간의 마음조차 상품화될 수 있는 세상에서 현실과 자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 '토탈 리콜'은 영화라는 특성과 슈워제네거라는 주인공 덕분에 화성에서의 액션 활극이 강조됐다. / imdb.com

 

폴 버호벤 + 아놀드 슈워제네거= 화성 활극 <토탈 리콜>

 

얼마전 <스타십 트루퍼스> 칼럼에서 다루었던 폴 버호벤 감독이 이 작품을 1990년에 영화화했다. 주인공이 'Rekal'사에 찾아가서 기억 주입 절차를 밟던 중 문제가 생겨서 기억이 돌아오는 장면까지는 원작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영화는 이후 화성에서 벌어지는 액션 가득한 ‘한바탕 대모험’에 큰 비중을 두었다. 주인공을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맡았는데 철학적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으면 안되지 않겠는가!

 

화성에서의 미션도 원작에서는 단순한(?) 암살이었던 것이 영화에서는 부패한 기업의 착취와 반란군 운동, 그리고 디스토피아적 거대한 정치적 음모라는 큰 이야기로 확대되었다. 기술적 내용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원작과 달리 우주여행, 테라포밍 기계, 미래적인 무기, 화성의 산업화된 모습 등 기술적 측면을 강화하여 볼거리도 풍성하다. 그 와중에 원작의 존재론적 질문도 어느 정도는 살려내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는 드물게도, 철학을 액션에 녹여내는 데에 성공했다.

 

폴 버호벤 특유 개성도 잘 살아있다. 세상을 비꼬는 듯한 비뚤어진 유머, 감각적인 연출, 그리고 시각적으로 몹시 충격적인 장면들(아놀드가 할머니 변장 속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이나 과학적으로는 매우 부정확한 장면이지만 진공 속에 던져진 주인공들의 머리가 부풀어 오르는 장면 등). 이 모든 장점들의 조합은 이 영화를 SF 클래식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이 기억주입절차에서 기억을 되찾는 순간부터의 모든 영화의 장면들이 주인공이 겪게된 현실인지, 아니면 Rekal사에서 주입한 가짜 기억인지 알 수 없게 연출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인터넷에서는 아직까지도 '가상설'과 '현실설' 두 '학파'가 나뉘어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현실설’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지만, ‘가상설’의 근거도 상당히 강력하다. 원작을 관통하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테마를 영화 그 자체에까지 반영한 영리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 현실인가? 지금 이 칼럼을 읽고 있는 독자여러분은 확신할 수 있겠는가?

 

P.S. 원작의 결말을 쓸 수 없어 생략하였지만 소설 속 퀘일의 ‘가장 허황된 꿈(아니면 현실)'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리고 그 꿈에서 비롯된 결말 역시 몹시 충격적이다. 꼭 원작을 일독해보시길 권한다.  


최기욱 변호사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플랜트엔지니어링 업계에서 엔지니어 및 리스크매니저로 근무했다. 이후 변호사가 되어 문과와 이과,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배경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기업의 사내변호사로 재직 중이며 작가, 강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비바! 로스쿨>(박영사. 2022), <엘리트문과를 위한 과학상식>(박영사. 2022), <잘 나가는 이공계 직장인들을 위한 법률계약 상식>(박영사. 2023), <법무취업길라잡이>(박영사, 2024), <웃게 하소서>(바른북스, 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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