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칼럼 SF읽기]를 쓰는 최기욱 변호사는 SF 열혈팬. 우주시대의 씨앗을 뿌린 SF명작들을 영상 리메이크 작품과 비교해 소개해온 '엔지니어 출신 변호사의 SF명작 읽기'를 개편해 우주문화의 공감대를 넓히는 칼럼코너로 마련했다. 이 글은 코스모스 타임즈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
달력은 이미 봄이 왔다고 주장하지만 아침저녁으로 겨울처럼 차가운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이런 때면 생각나는 핫초코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SF작품이 있다. 거장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원제 'The Door Into Summer')>다.
SF 작품치고는 상당히 감성적인 제목이다. 이 제목은 자신의 고양이가 눈 오는 날 침울한 표정으로 문 밖을 내다보고있자 하인라인의 아내가 "고양이는 '여름으로 가는 문'을 찾고 있다"고 말한 에피소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름으로 가는 문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은 1970년대와 2000년대를 넘나드는 시간 여행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1957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극에 등장하는 두 시점인 1970년대와 2000년대 모두 작품 발표시점에서는 미래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다루었던 <페리퍼럴>처럼.
주인공인 다니엘 분 데이비스(‘댄’)는 고양이 피트와 함께 살고 있는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발명가로, 가정용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약혼녀 벨과 사업 파트너 마일스와 함께 회사를 운영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회사 지분을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신당한 댄은 절망에 빠진 채 미래로 가는 냉동 수면을 선택한다. 30년 후인 2000년에 깨어난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음을 깨닫지만,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30년 뒤에는 가사도우미 같은 자동화 로봇이 현실화되어 있었다. 그 로봇들은 자신이 초기모델을 개발했지만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던, 그리고 벨과 마일스에게 빼앗긴 발명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의 특허가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자신이 얼어붙어있던 기간 동안에 말이다.
답은 하나다. 그는 곧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시간 여행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시간 이동 기술을 이용해 1970년대로 돌아가 배신을 막고 자신의 발명품을 보호하려 한다. 과연 그는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배신한 벨과 마일스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기술이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친구의 어린 딸 리키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이다. 지금의 현실은 과거의 내가 빚어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결말을 만든 신적인 존재가 있다. 그 결말을 다듬는 건 우리 몫이다. 자유의지와 운명예정설은 같은 문장이고 둘 다 진실이다. 진짜 세상은 하나뿐이고 과거와 미래도 하나뿐이다.”
두 개의 미래 1995년과 2025년을 오가며 배신과 복수, 사랑과 위로가 펼쳐지는 일본 영화 <여름으로 가는 문>.
▶네가 있는 미래로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이 따뜻하면서도 배신과 복수, 사랑 그리고 고양이가 등장하는 아기자기한 작품은 많은 하인라인 팬들에게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일본에서 2021년 영화화되었다. '네가 있는 미래로'라는 누가봐도 일본 영화스러운 부제를 달고. 미키 타카히로 감독 작품으로 우리에게 <아리스 인 보더랜드>로 잘 알려진 미남 배우 야마자키 켄토가 주인공을 맡았다.
일본으로 배경이 엄청나게 크게 바뀐 터라 많은 하인라인 팬들은 원작과의 차이가 심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우려했지만 영화는 원작의 굵직한 사건들을 꽤나 충실하게 따라갔다. 주인공과 어린 소녀의 사랑, 배신과 복수, 냉동수면과 시간여행 등 거의 모든 사건들이 재현되었다. 물론 초반에는 일본영화 특유의 ‘슴슴한’ 감성 덕분에 조금 지루했지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당연히 차이도 많다. 원작에서는 1970년대와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에서는 1995년과 2025년으로 시대적 배경이 변경되었다. 또한, 영화에서는 시간 여행의 방식이 다소 단순화되었다. 또 원작은 배신과 복수, 시간 여행의 논리적 퍼즐을 강조하는 반면, 영화는 감성적인 로맨스와 인간관계에 더 집중한다. 따라서 영화는 원작의 기술적 요소와 논리적 구조보다는 감정적인 흐름과 캐릭터의 관계 변화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하인라인의 작품들의 감상포인트 중 하나는 유능한 주인공이 엔지니어와 사업가로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하는 실감나는 생각과 행동들인데 로맨스 영화화되면서 이것이 거의 생략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영화 <여름으로 가는 문>은 원작의 핵심 아이디어를 유지하면서도, 일본 관객들에게 더 친숙한 설정과 감성을 반영하여 새롭게 각색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살벌한 SF의 세계에서도 고양이와 살갑게 교감하는 포근함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희망이 된다. / 여름으로 가는 문
▶봄이라도 왔으면
가슴 따뜻해지는 분위기가 특별한 작품이지만 하인라인은 하인라인이다. 시간여행과 관련해서는 7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흥미롭고 세련된 플롯으로 시간여행 역설을 다루고 있고, 이미 많이 현실화된 가정용 로봇과 가정화 기계, 특히 건설업계에서 일하는 분이라면 매일같이 접하고 있는 AutoCAD와 같은 자동 도면 설계 장치를 예언했다.
하인라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밀리터리 SF의 시초인 <스타쉽 트루퍼스>이기에 그가 이러한 따뜻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인라인은 이 작품을 비롯하여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원제 'Have Space Suit, Will Travel')>과 같은 아기자기하고 폭신한 작품들도 많이 집필한 바 있다.
주인공 댄은 단순히 배신에 대해 복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며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선다. 희망을 품고. 우리도 춥고 긴 겨울에서 벗어날 준비를 해보자. 고양이와 교감하는 주인공의 알콩달콩 드라마와 함께 따뜻한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해보는 것은 어떤가. 여름으로 가는 문을 활짝 열고서.
P. S. 사실 이 작품은 변호사들에게 눈물나게 환상적인 작품이다.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변호사로, 주인공은 그를 통해 발명을 특허받고, 그에게 법인을 설립해 사업을 꾸리게 하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한다. 하늘에서 의뢰인이 뚝 떨어져 떼돈을 벌게된 변호사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그 의뢰인은 변호사를 쪼아대지도 않고 그렇게 떼돈을 벌 발명과 계획만 던져주고 나서는 며칠 뒤 미래로 돌아간다!
최기욱 변호사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플랜트엔지니어링 업계에서 엔지니어 및 리스크매니저로 근무했다. 이후 변호사가 되어 문과와 이과,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배경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기업의 사내변호사로 재직 중이며 작가, 강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비바! 로스쿨>(박영사. 2022), <엘리트문과를 위한 과학상식>(박영사. 2022), <잘 나가는 이공계 직장인들을 위한 법률계약 상식>(박영사. 2023), <법무취업길라잡이>(박영사, 2024), <웃게 하소서>(바른북스, 2024) 등이 있다.